<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 - 카트리네 마르살>
짖밟혀도 불평하지 않는 사람이나 창녀와 나 자신을 구별 지으려 할 때, 사람들은 나를 페미니스트라고 부른다. - 레베카 웨스트
저자 이력 - 카트리네 마르살은 웁살라대학교를 졸업, 스웨덴의 유력 일간지 아톤블라데트의 편집주간을 지내며 국제 금융, 정치와 페미니즘에 대한 기사를 주로 썼고 경제학과 가부장제의 관계를 논한 저서 <유일한 성>으로 2012년에는 스웨덴 내 유력 문학상 아우구스트라프세트에 논픽션 부문으로 노미네이트 됨.
너무나 유쾌하고 한 챕터도 버릴 것이 없는 즐거운 책. 원서로 사서 다시 한번, 한국어 판은 주변인들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이었다.
밑줄
1 애덤 스미스의 어머니는 누구였을까?
페미니즘은 늘 경제학의 문제였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신만의 방을 가지고 싶어 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 페미니즘은 지금도 돈의 문제다. 과거 수십년 동안 페미니즘의 목표는 남자들이 독점해 온 돈과 특권을 가져오는 대신, '남들 앞에서 울 수 있는 권리'와 같이 수치화하기 힘든 것들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1960년대 들어 여성들이 일하기 시작했다." 보통 이렇게들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여성들은 항상 일을 하고 있었다. 20세기에 변한 것이 있다면 여성들이 일터를 바꾼 것이다. 집에서 일하던 여성들이 밖에 나와 일하고, 노동의 대가로 돈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저녁 식사는 어떻게 식탁에 올라올까? 이는 경제학의 근간이 되는 질문이다. 우리 대부분은 날마다 소비하는 것들의 극히 일부만을 직접 생산한다. 나머지는 구입한다. 1776년 정치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는 경제학에 대한 현대적인 정의를 내린 문장을 적었다. "우리가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것은 푸줏간 주인, 양조장 주인, 혹은 빵집 주인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그들의 욕구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손은 경제학에서 가장 유명한 표현이다. 보이지 않는 손은 모든 것에 영향을 주고, 모든 일의 방향을 정하고, 모든 곳에 존재하고, 모든 것을 결정한다. 애덤 스미스는 식탁에 앉았을 때 푸줏간 주인과 빵집 주인이 자신에게 친절을 베풀어서 저녁 식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바로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욕구가 교환을 통해 충족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그렇다면 스테이크를 실제로 구운 것은 누구였을까? 애덤 스미스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 이 경제학의 아버지는 거의 평생을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어머니가 집안일을 돌봤고, 사촌이 돈 관리를 했다. 애덤 스미스가 관세 위원으로 에든버러에서 일하게 되자 어머니도 함께 이사했다. 그의 어머니는 평생 아들을 돌봤지만, 저녁 식사가 어떻게 식탁에 오르는지를 논할 때 애덤 스미스가 언급하지 않고 넘어간 부분에 속해 있다.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집필할 당시 푸줏간 주인, 빵집 주인, 양조장 주인이 일하러 가기 위해서는 그들의 부인, 어머니, 혹은 누이들이 하루 종일 아이들을 돌보고, 청소하고, 음식을 만들고, 빨래하고, 눈물을 훔치고, 이웃과 실랑이를 해야했다. 어떤 식으로 바라봐도 그것은 또 하나의 경제에 기초하고 있다, 우리가 거의 이야기하지 않는 경제 말이다.
매일 아침 15킬로미터를 걸어가서 식구들에게 필요한 땔감을 모아 오는 11세 소녀는 국가의 경제 발전에 큰 역할을 한다. 그러나 한 나라의 총 경제 활동을 측정하는 GDP를 계산할 때 그녀는 포함되지 않는다.
이제는 경제가 보이지 않는 손 뿐아니라 보이지 않는 심장으로도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가 간혹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가 역사적으로 여성들에게 맡겨 왔던 임무들을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그린 것일지도 모른다. 애덤 스미스의 어머니가 아들을 돌봤던 진짜 이유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저 그녀가 아들을 돌봤다는 사실을 알 뿐이다.
돌봄은 언제나 간과되어 왔다. 돌봄이 없다면 인간은 존재할 수조차 없는데 말이다. 그 행위는 노동으로서의 가치를 인정 받지 못할 뿐더러 사적인 행위로서 존재했고 신자유주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안일하지만 dead-end job, 즉 커리어로서 발전 가치가 없는 무언가로 간주되었다.
어머니는 위대하지 않다. 위대하다면 모든 어머니에게 응당 그에 상응하는 보수를 주어야 한다. 마치 남편의 재산이 반절 인정되면 다행이거나 그것마저 여의치 않은 대한민국 속에서 오늘날 전업주부 어머니는 기생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2 애덤스미스의 경제적 인간을 소개합니다
난파선에서 살아남은 로빈슨 크루소는 경제학자들이 경제적 인간이라고 부르는 존재의 궁극적 청사진이 되었다. 그는 사회적 규범과 법이 없는 무인도에 혼자 떨어진다. 이곳에는 그의 행동에 제약을 가할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자신의 이익을 전적으로 추구할 수 있다. ... 로빈슨 크루소는 고립된 존재다. 경제학자들은 사람을 고립시켜 생각하는 것을 좋아한다. 무인도에 조난된 로빈슨 크루소는 세상사에 방해받지 않으면 사람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추측할 수 있게 해 준다. 대부분의 주류 경제학 모델은 바로 정확히 이런 조건을 토대로 하고 있다. ...
이 접근법이 가진 모순을 똑똑한 경제학자들은 항상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방법은 계속해서 '경제학자처럼 생각하기'의 근간이 되어 왔다. ...
경제학자들은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류가 어떤 식으로 기능하는지에 대해 심오한 진리를 밝혀냈다고 생각한다. ...
로빈슨 크루소는 경제적 인간의 전형적인 예다. 경제학자들이 '호모 에코노미쿠스'라고 부르는 이 사람은 우리가 아는 경제 이론의 기초를 제공하는 존재다.
4 세상에 유일한 진리는 경제학뿐?
해결책은 경제 성장이엇다. 케인스는 경제를 성장시킬 수 만 있다면 2030년이면 적어도 유럽과 미국에서는 위에 열거한 문제가 없어질 것이고, 우리는 모두 잘 살게 되어 결국 일을 하지 않아도 될 날이 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예술, 시, 영적 가치, 철학, 삶의 즐거움을 누리고 '들판에 핀 백합'을 감상하는 데 시간을 바칠 수 있다. 케인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말이다.
그는 경제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사람들이 경제적 인간의 정체를 직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 그 목표가 달성되면 그를 기차 밖으로 던져 버리면 된다. 케인스에게 경제적 인간은 유용한 멍청이였다. 결국에는 "지금까지 고마웠어. 이제는 안녕 하고 없애 버릴 수 있는 존재.
어떻게 보면 케인스가 옳았다. 우리는 더 부유해졌다. 세계경제는 모든 예측을 뛰어넘는 수준의 성장을 이루었다. ... 그런데 케인스가 경제 성장 다음단계에 나타날 것이라 상상했던 것들은 낌새조차 없다. ... 우리 사회는 그 어느 때 보다 경제학에 집착하고 있다. 케인스가 경제 성장 이후 옆으로 치워 두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경제적 사고"는 오히려 문화적으로 더 깊게 뿌리 내렸다.
계량경제학적 분석만이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경제학은 더 이상 우리가 중요한 일에 집중하도록 돕는 학문이 아니다. 오히려 경제학적 논리만이 진실인 것처럼 되어 버린다. ... 물질적으로는 성장했지만 '경제 문제가'가 해결될 전망은 요원해 보인다. 자 전 세계의 연간 성장의 정도로 금액으로 환산해 세계 인구 65억 명으로 똑같이 나눠 보자. 그러면 일인당 대략 1200만원 정도로 떨어진다. 이 정도면 아무도 굶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실제 세상을 보면 상황은 완전히 다르다.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하루 약 2500원 이하로 먹고 살아야 한다. 이들 중 대다수가 여성이다. 빈곤은 여성의 문제가 되었고, 수백만 명의 여성들이 더 나은 삶을 위해 아주 멀리, 많은 경우 자녀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떠나야 한다. 돈을 벌기 위해 다른 사람의 자녀를 사랑하고, 청소하고, 식당에서 일하고, 공장이나 농장에서 일하고, 성매매 산업이나 지하 경제에서 일해야 한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경제학적 논리' 라는 것은 그냥 아무 논리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의미에 관한 거대한 담론'이라는 사실이다. 사람들의 근본적인 동기가 경제적이기 때문에 경제학자들이야말로 인간을 이해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세상을 어떻게 조직해야 우리의 가장 내적인 본성에 이로운가를 알려 줄 수 있다. 우리의 가장 내적인 본성은 물론 '이익을 거두는 것'이다.
케인스 이후 80년 동안 케인스처럼 경제학의 목적이 세상에서 빈곤을 없애는 것이라고 정의한 경제학자는 거의 없다. 경제과학은 자신을 더 이상 이렇게 보지 않는다. 부자와 빈자, 권력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기업과 노동자, 남성과 여성 사이에서 편을 들어야 할 경우, 최근 몇십 년 동안 경제학자들은 항상 같은 편을 들어 왔다. 돈이 있고 권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좋은 것은 거의 항상 경제에 좋은 것으로 간주됐다. 그와 동시에 경제과학은 점점 더 추상적이 되었다. 가상의 가계, 가상의 기업, 가상의 시장에 대한 연구. 모든 것이 경제적 인간에 기초한다.
경제학자들은 인종차별에서 오르가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자신들의 모델을 적용하는 데 열을 올려 왔고, 실제 시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연구하는 데는 점점 관심을 잃었다.
동시에 케인스가 걱정하던 문제들은 해결될 기미조차 없다. 많은 경우 그 문제들은 눈에 보이지 않게 되어 버렸다.
우리 모두가 합리적인 개인이라는 가정을 받아들이면 인종, 계층, 성별 등에 대한 의문은 의미 없어진다. 우리는 모두 자유로은 존재들 아닌가. 콩고에 사는 한 여성처럼 말이다. 그녀는 통조림 세 개를 얻기 위해 민병대 군인들과 성관계를 맺어야 한다. 칠레에 사는 한 여성처럼 말이다. 그녀는 과일 수확을 하며 살충제를 들이마셔 2년 후에 신경이 손상된 아이를 출산할 것이다. 혹은 모로코에 사는 한 여성처럼 말이다. 그녀는 공장에 일자리를 얻으면서 큰 딸을 자퇴시키고 집에서 동생들을 돌보게 했다. 그들은 모두 자신의 행동이 가져오는 결과를 늘 완벽히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언제나 가능한 한도 내에서 최선의 결정을 내린다.
자유라는 단어는 단에에 불과하다. 정말로 단어에 불과하다.
5 경제학이 여성을 가뿐히 무시하는 방법들
그러나 직장에서 풀타임으로 일하기 위해서는 집안일을 풀타임으로 돌봐 줄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오늘날 여성들은 직장에서 일하지만, 그 시간 동안 집안일을 돌볼 사람을 구할 수 있는 것은 그만큼의 재력이 있는 소수에 불과하다. 이는 결코 수사적인 질문이 아니다. 세계경제를 감싸고 있는 복잡다단한 돌봄 체계를 들여다보지 않고는 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전 세계적으로 가사노동에 고용된 사람들은 다른 어떤 일보다 긴 노동 시간, 불안정한 조건, 예측 불가능한 업무를 감수하고 있다. ... 방정식의 다른 한쪽에는 홍콩에서 일하는 필리핀 출신 가사 도우미가 있다. 그녀는 필리핀 시골 지역의 남성 의사만큼 수입을 올린다. 그런가 하면 이탈리아에서 일하는 외국인 보모들은 고국에서 버는 것보다 7배에서 15배의 많은 수입을 올린다. 이들은 피해자인가? 그렇다면, 누구와 비교해서?
이 여성들은 이런 방식으로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해결한다. 이들이 힘을 갖는 길이기도 하다. 아버지와 전남편을 극복할 수 있는 힘. 많은 나라에서 여성 이민자들이 고국에 보내는 돈은 해외 원조와 외국인 투자를 합친 것보다 국가 경제에 더 큰 기여를 한다. 필리핀은 이 송금액이 GDP의 10%를 차지한다.
고용 시장에서는 여전히 인간을 형체와 성별이 없고, 가족이 없으며, 상황에 대한 고려 없이 이윤 추구를 목표로 하는 개인이라고 정의한다. 여성은 그런 존재 중 하나가 되거나, 반대로 눈에 띄지 않고 희생을 통해 균형을 맞춰 주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페미니스트 경제학자 메릴린 웨어링은 짐바브웨이의 로펠트에 사는 한 젊은 여성이 제공하는 무보수 노동을 예로 든다. 그녀는 새벽 4시에 일어나 11킬로미터를 걸어서 양동이 하나에 물을 채운다. 집에 돌아오면 세 시간이 지나 있다. 물론 맨발이다. 땔감을 모으고, 설거지를 하고, 점심을 차리고 또 설거지를 한 다음 채소를 수확하러 나간다. 또 물을 길으러 길을 나선다. 돌아와서 저녁을 짓고 동생들을 재우면 밤 9시가 된다. 경제학적 모델에 따르면 그녀는 일을 하지 않는 비생산적, 비경제적 존재다.
전 세계적으로 여성은 전체 일하는 시간의 3분의 2를 무보수 노동에 바친다. 남성의 무보수 노동 시간은 4분의 1이다. 농업 부문이 큰 개발도상국에서는 이 격차가 더 크다. 네팔에서는 여성이 남성보다 매주 21시간 더 일한다. 인도는 12시간이다.
캐나다의 국가 통계청에서 무보수 노동의 가치를 계산한 결과, GDP의 30.6~41.4%를 차지하는 것으로 측정되었다. 30.6%라는 수치는 무보수 노동을 보수 노동으로 대체하면 어느 정도의 비용이 들 것인지를 기준으로 계산한 것이다. 41.4%는 가사노동자가 집안일 대신 다른 노동을 했을 때 얼마나 벌 수 있을지를 기준으로 계산한 것이다.
경제가 번영하려면 한 사회는 사람, 지식, 그리고 신뢰를 갖춰야 한다. 그리고 이 자원들은 상당 부분 무보수 가사노동의 결과로 양성된다. 행복하고 건강한 아이들은 모든 긍정적 성장의 기반이다. 심지어 경제 성장에도 말이다. 한편 경제적 인간은 아동기도 사회적 맥락도 없는 존재다. 그는 땅에서 버섯이 자라나듯 생겨났다. ... 경제적 인간이 보편적이라는 생각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여성도 그와 동일한 것처럼 간주해서 경제학자들의 모델에 맞게 구겨 넣어야한다. 바로 여기에 동등한 권리와 자유가 있으니 시장에서 마음껏 경쟁하라.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여성은 본질적으로 남성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노동 시장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남성이 남성을 위해 만들어 낸 구조 안에서 앞으로 전진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여성을 제외하는 현실 안에서. 이는 문제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
여성은 경제적 인간의 세상을 향한, 남성과 동등한 접근권을 보장받기 위해 여전히 투쟁하고 있다. 일터에서 책임감을 증명하기 위해, 그리고 그녀가 진정으로 있어야 할 곳은 집이라는 생각을 종식시키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해야만 한다. 이와 동시에 여성은 남성과 달리 가정과 가족을 보살피는 능력도 심판받는다. 그 결과로 빚어 지는 일과 가정사이의 갈등은 여성의 문제로 묘사된다. 그것을 해결하는 것은 여성의 책임이다.
어머니가 되면 모든 것이 충돌한다. 서로 분리돼야 할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갑자기 한데 섞인다. 출근할 때 버려두고 온 사적인 자아 곁에 임신한 배까지 두고 나오기가 불가능한 것이다. 보수를 받고 일하는 직장에 가정의 흔적을 가지고 가야만 한다. 자기 자신과 자기 자신 이상의 그 무엇을.
그것은 그녀도, 보수 노동의 세계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는 부분이다. 경제적 인간은 모유가 나오는 가슴도, 호르몬도 없다. 그에게는 육체가 없다. 아기가 그의 어깨에 토한 적도 없다.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선진국 전역에 걸쳐 여성은 남성에 비해 스트레스를 더 심하게 받고 시간 부족을 호소한다. 계층이나 직장과 무관하다. 이는 성별과 관계있는 차이다. 여성들이 이런 느낌을 받을 때 주로 비난받는 것은 페미니즘이다. ... 그리고 여성들은 여성들은 계속해서 정확히 그렇게 하고 있다. 여성들은 노동 시장에 진입했지만 남성은 그에 상응하는 정도로 집안일에 진입하지 않았다. 일과 가정사이의 경계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미국 여성운동가 글로리가 스타이넘은 페미니즘을 '여성들이 기존의 파이에서 더 큰 조각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파이를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정의한다.
한 세대 전체가 "너는 무엇이든 될 수 있어"라는 말을 "너는 무엇이든 되어야만 해"로 해석했다. '모든 것을 갖는 것'은 '모든 것을 하는 것'이 되어 버렸다.
건물에서 제일 큰 물건이 없어도 상관없어야 한다. 물건이 없어도 괜찮아야 한다. 여자여도 말이다.
8. 남자는 경제적으로 합리적이라는 착각
현실에 존재하는 우리는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개인이 아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마찬가지다. 우리는 남을 배려할 때도 많고, 가끔은 혼란스러워하며, 희생정신을 보일 때도 이쏙, 걱정도 자주 하며, 비논리적일 때도 많다. 무엇보다 우리는 누구도 섬처럼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경제적 인간과 다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경제적 인간인 것처럼 행동한다. 따라서 경제적 인간에 기초한 모델을 통해 사람들의 행동을 예측하고 경제의 동향을 내다보는 게 가능하다는 것이 프리드먼의 논리다.
9. 어떻게 자극할 것이냐, 그것이 문제
그로부터 수천 년이 흘렀고, 시장 논리는 강둑을 넘어 범람했다. 위로, 밖으로, 안으로 마구 넘쳤다. '경제학'이라는 말은 '합리성'이라는 말과 동일시됐다. 사고, 팔고, 경쟁하는 것은 사회 전체의 이미지가 됐다. 정치도 이 방식으로 분석되기 시작했고 법, 사랑, 심지어 인간 존재에까지 시장 논리가 적용되고 있다. 우리가 어떤 거래를 하면, 여기에 경제학의 자기 이익 추구, 경쟁, 최소 비용으로 얻는 최대 효과 등의 논리가 어떻게 적용되는지 이야기하는 사람이 꼭 있다.
"냉소적인 사람이란 모든 것의 가격은 알지만 어떤 것의 가치도 모르는 사람이다." 오스카 와일드
<부부의 경제학: 경제학을 이용해 사랑, 결혼, 설거짓거리를 정복하는 방법>에서 폴라 슈먼과 제니 엔더슨은 경제 원칙을 이용해 남녀 관계를 향상시켜 주겠다고 한다.
슈먼과 앤더슨은 결혼을 투기 경향이 있는 사업이라 보고, 이 책을 통해 수익을 극대화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고 말한다. 시장 논리를 침실까지 끌어들인 것이다. ...젠은 동기 부여 체계를 만들어 낸다. 젠은 하워드가 3일 연속으로 화를 내지 않으면 그와 잠자리를 같이해 준다. ... <부부경제학>은 이런 방식을 도입함으로써 젠이 결혼 생활의 근본적인 요소를 변화시켰다는 점은 언급하지 않는다. 젠은 경제적 개념의 동기 부여 체계를 도입함과 동시에 부부 관계의 성숙한 성적 요소를 없애 버렸다.
두 사람 사이의 유희이자 상대방과 하나가 되자는 초대의 의미였던 성생활이 보상 체계로 변해 버린 것이다. 하워드는 성숙한 어른에서 성관계를 갖기 위해 억지로 의젓하게 행동해야 하는 괴상한 애어른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젠의 몸은 그녀의 일부가 아니라 도구가 됐다. 남편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
경제적 동기 부여책은 그것이 효과가 없어서라기보다, 효과를 발휘하더라도 때때로 상황의 본질을 바꿔 버려서 문제가 된다. ....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당근을 쫓고, 모든 채찍에 반응하는 고립된 개체들이 아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경제적으로 계산되는 세상에 살고 있지 않다. 이스라엘 보육원의 경우처럼, 어떤 경우에는 경제적 동기 부여책을 도입함으로써 바람직한 상황을 유지하던 가장 중요한 동기를 없앨 수도 있다.
10. 돈을 요구하면 이기적인 사람이다?
경제학은 사랑을 아끼고자 했다. 이를 위해 사랑은 모든 것에서 배제되었다. 그리하여 배려, 공감, 돌봄 등의 덕목은 경제적 분석에서 밀려났다. 어떤 행동은 돈을 위해서만 존재하고, 어떤 행동은 배려를 위해서만 존재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절대 만나선 안 되었다.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사실은 똑같은 현상이 대칭처럼 반대편에서도 일어났다는 점이다. 사려 깊음, 공감, 돌봄 등에 관한 논의에서 돈과 부에 관한 이야기가 빠진 것이다. 어쩌면 이야말로 현재 여성의 경제적 지위가 남성에 비해 훨씬 열등한 이유를 가장 잘 설명해 줄지도 모른다.
"돈은 인간의 행복을 추상적으로 나타내는 개념이다."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말했다. "따라서 인간적 행복을 질제적으로 즐길 능력이 없는 사람은 온 마음을 돈에 바치게 된다." 돈은 굳어진 욕망이다. 이 욕망은 특정한 무언가에 대한 게 아니라 욕망의 충족 자체를 상징한다.
우리는 돈을 숭배한다. 그러나 어떤 면으로는 이게 꼴사납다는 생각도 한다. 대부분의 욕망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특히 여성들이 그럴 때는 더더욱.
가정은 전통적으로 돌봄의 장소다 가정은 차갑고 비인간적인 세상에서 돈을 버느라 힘든 하루를 보낸 남성이 돌아오는 곳이다. 그곳은 감정과 도덕, 관능이 지배하고, 손뜨개 레이스 커튼으로 장식된 부드러운 여성의 세계다.
이 세계에서 남성은 바람직한 행동을 해야만 경제적 보상을 받는 기계의 부속품이 아니어도 됀다. 가정에서는 시장의 원리에서 벗어나, 여자의 관대한 시선을 받으며 더 나은 사람이 될 여유를 가질 수 있다. 여성의 의무는 돌봄과 공감으로 남성의 삶에 균형을 가져다 주고, 남성이 접하지 못하는 인간적인 경험을 느낄 수 있도록 연결고리가 되어 주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돌보는 일이 가정을 벗어나 병원, 보육원, 양로원으로 옮겨 간 후에도 사랑과 돈의 이분법은 그대로 지속된다. 다른 이를 돌보는 행위를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좋은 인간, 즉 여성이기 때문이다. 커리어를 추구하거나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가 아니다.
과거 간호사 중에는 수녀가 많았다. 그들은 평생 빈곤 속에서 살겠다고 맹세했다. 수녀를 제외한 간호사는 대부분 젊은 미혼 여성이었다. 이들은 보살펴야 할 가족이 없었고, 나중에는 결혼해서 남자가 벌어 온 돈으로 먹고 살면 되었기 때문에 간호 일로 생계를 꾸릴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간호사의 사명은 숭고하고 중요하다는 논리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금전적 보상이 주어져서는 안 됐다.
남성에게는 그 반대 논리가 적용됐다. 우리는 사회에서 중요한 일에는 큰 금전적 보상이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큰 은행이 파산하면 경제 전체가 무너질 것이다. 따라서 나는 7억원을 보너스로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 논리가 여성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리고 누군가를 돌보는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주로 여성이므로, 이런 업종에도 이 논리가 적용되지 않는다.
현대 간호 개념의 기초를 놓은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1820년 피렌체에서 태어난 영국인이었다. 신앙심이 깊었던 플로렌스는 어려서부터 자신에게 간호사라는 소명을 주었다고 믿었다. ...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플로렌스는 간호학을 공부했다. ...1853년 크림전쟁이 발발했다. ... 병사들 사이에 콜레라가 번졌고 후방의 영국인들은 이 소식에 충격을 받았다.
나이팅게일은 자신의 돈과 <The Time> 독자들이 기부한 돈을 합쳐 필요한 물자를 사기 시작했다. ...야전 병원 근처의 집 한 채를 통째로 세내어 세탁을 했고, 근처 시장에서 장을 볼 때 감귤류 과일을 꼭 포함했다. .... 나이팅게일은 런던에서 잘나가는 유명 요리사를 고용했다.
나이팅게일이 시작한 위생 관리 작업으로 치사율이 급격히 감소했고, 그녀는 이 성공에 대한 통계 수치를 꼼꼼히 기록했다. 군의관들의 끊임없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간호 업무에 혁명을 가져왔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전설이 됐다. 그녀는 부상당한 사람들로 가득한 병실에서 하얀 제복을 입고 환자들을 돌보는 아름다운 여성으로 묘사됐다. .... 나이팅게일의 이미지는 여전히 돈에 관심이 없는, 조용하고 수줍고 신중한 태도의 천사 같은 모습이다. 그러나 실제로 나이팅게일은 사회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싸움꾼으로, 경제학에 큰 관심을 가진 여성이었다. 간호학에 대한 새로운 사고방식을 가져오기 위한 싸움에서 그녀가 휘두른 무기는 통계였다. 조용히 볼을 붉히며 자신의 공을 부인하는 이타심이 아니었다.
나이팅게일은 간호사들이 정당한 보수를 받게 하려 평생을 싸웠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었다.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할 때 돈이나 선의 중 한 가지 요인만이 동기가 된다는 생각에 얽매여 있다. 게다가 이 개념은 성별에 관해 우리가 가진 이미지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남성은 자기 이익 추구라는 본능에 의해 나아가고 여성은 전체적인 그림을 조화롭게 만드는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다.
여성들은 인류를 위해 자신의 허리와 영혼을 바쳐 봉사하도록 태어난 것도, 냉엄한 시장에 대비되는 부드러운 힘으로 사회의 균형에 맞추는 역할을 하기 위해 태어난 것도 아니다. ....그러나 무한정한 천연자원을 캐듯, 돌보는 손은 여성의 본능으로부터 항상 얻을 수 있다는 신화는 흔들리지 않고 있다. 그렇게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이팅게일마저 우리가 필요로 하는 이미지로 만들었다. 남성들이 자신들의 사회가 구멍 나지 않고 잘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데 필요한 이미지 말이다. 문제는 이것이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한 전략인가 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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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는 사랑을 병에 담아 보존하고 싶어 했다. 경제학자들은 그 병에 라벨을 붙이고 '여성'이라고 썼다. 내용물은 다른 것과 절대 섞이면 안 되었고, 자물쇠가 달린 장에 잘 보관되어야한 했다. 이 '또 다른 경제'는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간주됐다. 사실 이건 경제도 아닌, 전체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마르지 않는 천연 자원이었다.
12. 인간이 하나의 기업체가 되는 세상
페미니스트 웬디 브라운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사실은 시장을 진심으로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여기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신자유주의는 자신이 실제라고 믿는 상태를 현실화하는 데 전력을 다한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사람들이 무엇보다 경쟁적인 존재라고 가정한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의 경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규제 완화, 세금 감면, 재고 정리 세일 등 정치적인 수단을 계속해서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고전적 자유주의는 시민으로서의 인간과 경제적 주체로서의 인간을 구분했다. 신자유주의에서는 그렇지 않다. 사람 사이에는 오직 한 가지 관계만이 존재하며, 그것은 경제적 관계다. 다시 말하면 시민과 노동자와 소비자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 모두 동일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바로, 경제적 인간이다.
...신자유주의는 단순히 정치적 체계가 아닌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다.
시카고 학파 경제학자 게리 베커는 1992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 연설에서 "지금 이런 말을 하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내 책의 제목을 <인적 자본>이라고 결정하기까지 한동안 망설였다고 밝혔다. .... 인적 자본이라는 용어를 통해 모든 사람이 자신을 판매하는 기업의 주인이 되었다.
신자유주의는 인간을 자본으로 변화시킴으로써 노동과 자본 사이의 갈등을 간단히 해결한다. 즉, 인간의 삶을 시장 가치를 높이기 위한 일련의 투자 행위로 보는 것이다. 기독교 신학자들은 빵 한 쪽과 생선 한 마리로 신도들을 먹이는 것이 가능했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누구나 먹고살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당신의 능력을 빋는다. 험한 세상이기는 하지만 당신을 위해 존재하는 세상이다.... 이 관점은 우리 모두를 평등하게 만들었다. 실업자 센터를 찾는 여성이나 ...CEO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단지 자신이라는 자본에 투자를 잘했는지 못했는지의 차이, 그리고 태어날 때 주어진 첫 자본금의 차이가 존재할 뿐이다. .... 이런 시각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 사실 이것만큼 진지하게 받아들여진 시각도 없기는 하지만 - 인간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다르게 받아들인 것이다.
15. 왜 중요한 이야기의 주인공은 늘 남성일까?
경제학자들은 경제 체제를 돌보는 데 필요한 지식을 사회에 제공하는 것이 자신들의 역할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현재의 경제학자들이 가장 많이 닮은 선조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나 아이작 뉴턴 같은 과학자가 아니다. 오히려 로버트 H.넬슨이 <종교로서의 경제학>에서 주장하듯 토마스 아퀴나스나 마틴 루터와 같은 신학자에 더 가깝다. 넬슨은 경제학자들이 경제적 진보가 구원의 길이라는 복음을 퍼뜨리는 현대 성직자의 기능을 수행한다고 말했다.
정식으로 인정받은 경제 교회도, 서품을 받은 성직자고, 성서를 지정하는 공식적인 칙령도 없다. 심지어 경제 이론이 무엇인지에 대한 명확한 규정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시장 논리가 인간의 본성 안에 존재한다는 믿음을 늘 마음속에 품고 다니게 되었다. 이 논리는 우리 문화에 점점 더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점점 더 다양한 생활의 영역에 이 논리를 적용할 것을 권장받는다. 경제적 인간에 대한 논의는 따라서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문제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경제적 인간이다. 그리고 그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가 여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16. 환상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시할 용기
경제적 인간의 모든 특성이 우리가 남성성이라고 규정한 모든 특징과 일치하는데서 문제가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 특성들이 우리가 여성성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우월하고 그 위에 군림할 가치가 있다고 받아들이게 된 것이 더 큰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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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은 육체이자 땅이고, 수동적이다. 여성은 의존적이고 자연을 의미하며, 남성은 그 반대다. 남성은 그녀를 단련하고, 일구고, 그녀에게서 자원을 뽑아 간다. 그는 그녀에게 의미를 부여하고 활기를 불어넣어 움직이게 한다.
경제적 인간은 그의 남성성의 힘을 통해 군림한다. 기업의 이윤은 경제의 다른 모든 야망이나 기업의 야망보다 우선시 되어야 한다. 정의, 평등, 보살핌, 환경, 신뢰, 육체적/정신적 건강은 그 밑에 종속된다. ... 따라서 정의, 평등, 보살핌, 환경, 신뢰, 육체적/정신적 건강은 경제 가치를 창조하는 방정식의 일부가 아닌 그 반대의 가치로 해석되었다.
수백 년 동안 의존은 수치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것은 노예나 여자들이 하는 행동이다. .... 노동자 계층의 남성들이 하루 종일 노동해서 독립성을 가질 수 있으려면 가정을 돌보는 여성들에게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은 역사에 포함되지 않았다. 애덤 스미스가 자기 어머니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런 맥락에서 내가 영화 기생충을 보고 불편했던 점이 일부 해소된다. 가난한 가족은 부자 가족에게 돌봄의 영역에 해당하는 노동을 제공하고 돈을 받지만, 그들은 기생하는 것이 된다. 그들의 노동자체를 부정한다. 그들이 부자 가족의 개인적 영역을 침범하고 미성년 여자 아이를 희롱하는 것이 감독의 문제의식이었다면 제목은 기생충이 아닌 부정 취업이라던지 의제 강간이라던지 다른 옵션이 있었을 테지만 감독은 제목을 기생충으로 지었다. 이 제목이야말로 감독이 돌봄의 영역에 존재하는 노동을 경제 가치를 창조하는 방식으로 간주하고 있지 않다는 확신을 만든다.
시장은 인간의 본성 안에 존재한다. 모든 사회는 그 사회가 만들어 낸 헛소리에 고통 받는다.
경제학은 인간과 사회 발전을 위한 기회를 만들어 내는 수단이어야 한다. .
우리의 관계는 경쟁으로만 한정할 필요가 없다. 자연을 적대적인 상대로 간주할 필요도 없다. 모든 부분을 합친 것보다 전체가 더 크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세상은 기계 혹은 정교한 기계적 움직임으로 돌아가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경제적 인간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해방시킬 수 있다. 그러면 모든 것이 헛되다 느낄 수 있는 상황은 많지만 이 문제만큼은 헛되다 외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여정의 목표는 바뀔 수 있다. 세상을 소유하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편안하게 살려고 애쓰는 여정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